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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정책에 관한 몇 가지 제언

작성일2026-09-1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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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포럼 2026. June. vol.360

정부가 발표하는 경제 대책에서 조세정책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세정책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조세정책이 뚜 렷한 방향성과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설계·운영되는지는 의문이 든다. 그보다는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급하게 세제가 만들어졌다가 또 갑자기 변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제는 이런 임시변통적 조세정책 설계 및 운영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시각에서 원칙을 가지고 조세정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나라의 조세정책은 지금 단순한 세율 조정이나 세목별 미세 손질의 차원을 넘어, 어떤 경제질서를 지향하고 어떤 복지국가를 설계할 것인지에 관한 근본 질문 앞 에 서 있다. 우리 헌법상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 는 시장경제질서이며, 국가의 규제와 조정은 그 자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 이고 보완적인 수단이어야 한다. 조세정책 역시 이러한 헌법적 질서 위에서 설계되어 야 하는데, 지난 시기 한국의 세제 논의는 지나치게 정책 수단화·정치화되었고, 형평 이라는 가치에 과도하게 기울었으며, 상징적 구호가 정책 판단을 압도하는 경우가 적 지 않았다.

이제 조세정책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떤 사회적 비용을 감수하며, 어떤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를 핵심적인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출발점 위에서만 효율성, 형평성, 간편성의 균형이 가능하고, 세대 간 부담의 공정한 배분도 논의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조세정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자 한다.

조세의 본질적 기능  재정립

첫째, 조세의 본질적 기능을 되살리고, 조세의 정책적 기능에 대한 과도한 기대 를 낮추어야 한다. 조세의 본질적 기능은 자고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정수입의 안정 적 확보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것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물론 조세가 경 기 조절, 특정 경제활동의 조장 또는 억제, 부의 재분배 등 여러 정책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수적 기능이 본질을 압도할 때 세제는 체계를 잃은 채 점점 복잡해지고, 납세자의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며, 조세가 정치적 메시지 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오·남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조세가 특정 집단을 부정시하거나 여론을 달래는 정치적 상징으로 쓰이기 시작하면, 세금의 정당성은 약화된다. ‘부자 감세’ 또는 ‘부자증세’와 같은 구호는 귀에 쏙 들어오고 선명하지만, 세제가 투자와 고 용, 자본 이동, 경제주체의 행동, 장기 성장에 미치는 복합 효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 한다. 조세정책 당국은 상징의 언어로 세제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 세금은 도덕적 판 단 잣대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세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이 본질적 기능이고, 경기조절이나 분배 등의 유도적·형성적 기능은 부수적이고 제한적인 기능 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형평과 효율간 균형 유지

둘째로, 형평과 효율 간에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 특히 형평에 기울어져 조세 가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지나치게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 라 세제는 이미 매우 강한 누진성을 띠고 있다. 가령 상위 1% 법인이 법인세 세수의 88.2%를, 종합소득세 상위 10% 소득자가 세수의 84.9%를, 근로소득세 상위 10% 근 로자가 세수의 73.3%를 부담하고 있다. 한국은 면세자 비중이 높고, 고소득자의 세부 담이 커 상대적으로 조세의 누진성이 큰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후 과제는 막 연한 추가 누진화가 아니라, 이미 높은 누진성이 왜 사회적 신뢰와 지속가능한 성장, 효율적인 복지 전달로 연결되지 않는지 그 원인을 진단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강구하 는 것이다. 보유세의 경우에도, 효율성과 대비되는 형평을 보유세의 핵심 정책목표로 삼는 것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형평성은 주로 소득세나 상속·증여세 등에서 추 구되어 온 가치이며, 보유세의 주된 기능으로 논의되어 온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형평 을 내세워 세부담을 급격히 높이고, 이후에는 현실의 조세저항과 납세능력 문제를 완 화하기 위해 각종 예외를 덧붙이는 방식은 좋은 세제 설계가 아니다. 좋은 조세정책은 목표가 타당하고 수단이 적합해야 하며, 납세자가 제도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재정 팽창과 조세지출 통제

셋째로, 재정 팽창과 조세지출을 통제해야 한다. 조세정책은 재정지출의 현실 과 결합해 논의되어야 한다. 일상화된 추경과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그리고 중앙정 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비대칭적 재정 운영에 대하여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정부 동안 추경이 반복되면서 제대로 집행되지 못한 사업이 늘었고, 예산안에 만 잡혀 있고 실제 집행되지 못한 불용액이 막대한 액수에 달하는가 하면, 한번 추경 에 포함된 사업이 집행 여부와 무관하게 다음 해 본예산에 계속 살아남는 현상은 우 리나라 재정이 얼마나 강한 관성과 비효율을 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비타당성조 사 면제도 마찬가지다. 원래 예타 면제는 지역 균형 발전 등 예외적 필요에 대응하기 위한 장치인데, 실제로는 정치적 동기로 지역 낙후도와 무관한 사업들이 포함된 예가 많다. 이런한 현상들이 누적되면 재정은 정책 판단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적 거래의 결과물로 변질된다. 정부는 세수 확대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세출 구조와 조세지 출의 통제, 사전 검증 절차의 엄격성까지 함께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편, 중앙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는 동안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에 법정 비율로 자동 배분되는 재원이 오히려 방만한 지출을 유도하고 있는 점도 우려가 된다. 예컨 대, 내국세의 20.79%를 교육청에 지급하도록 한 제도적 구조 때문에 학령인구의 감 소에도 불구하고 지방교육청은 넘치는 교부금으로 초등학생 예체능 교육비 지급, 중 학생 전원 태블릿 PC 지급, 수학여행용 호텔 매입 예산 등 돈 뿌릴 곳을 찾아다니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어떻게 ‘더 걷을 것인가’보다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먼저 제도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불용액이 누적되고, 사업 타당성 심사가 무력화되며, 자동 배분식 교부금이 방만한 지출을 유발하는 상황이라면 증세 논의는 국민적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재정의 절제와 조세의 정당성은 따로 갈 수 없다.

장기적 시각과 준비 필요

넷째로, 조세정책 당국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조세제도를 어떻게 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세제발전심의위원회는 매년 단위의 세법 개정을 담당하는 기구이고, 중장기조세정책심의위원회는 법률상으로는 5개 연도 이상의 기 간에 대한 중장기 조세정책운용계획 수립을 담당하여야 하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중 장기적 시각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향후 1∼2년 정도의 조세정책 방향 제시에 머물 고 있다.
저출산의 심화와 노령인구 급증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 머지않아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미래에 따른 근로형태의 변화, 세대 간 형평성, 조세와 사회보장제도의 통합적 고려, 소득과세와 소비과세의 재조정, 경제구조 전환에 대비한 세제 연구 등 장기적 고찰과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구조적 변화 앞에서 지금과 같은 세입 기 반과 세출 구조가 유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낙관이 아니라 회피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조세정책 당국에 드리고 싶은 제언은 이러하다. 세금을 정의의 상징 으로 과장하지 말고 국가 운영의 제도로 다루어야 한다. 형평이라는 이름으로 효율과 예측 가능성을 해치지 말아야 하며, 닥쳐올 구조 변화에 대비한 장기 구상을 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효율을 너무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형평을 추구하고, 현재 세대의 편 의를 위해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는 세제와 재정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현재 한국의 조세정책에 요구되는 것은 단기적이고 신속한 대응이 아니라, 조세 원칙에 대 한 근본적 성찰, 공론의 확장, 그리고 장기적 관점의 확보이다. 이제 조세의 본질적 기 능을 재정립하고, 지속가능한 국가 발전을 뒷받침할 새로운 조세 패러다임을 구축해 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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