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건희 회장의 진짜 克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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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0.26. 오전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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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저널에서 부고 기사 알람이 울린다. ‘이류 전자 부품 제조사를 세계에서 가장 큰 스마트폰과 가전·반도체 생산자로 변모시킨 대한민국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회장.’ 기사 내용에 나오는 인물 평이다.

문득 1990년대 후반 미국 유학 시절이 떠오른다. 당시 삼성 제품은 미국 대형 가전 양판점 베스트바이 한구석에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미국 친구들은 삼성을 일본 소니의 하청업체 정도로 알고 있었다. 외환 위기 후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던 세기말, 우리가 과연 일본을 한번이라도 넘어설 수 있을까 회의적이던 그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삼성 임직원과 이건희 리더십은 10여년 만에 모든 것을 바꾸었다. 2011년 미국에서 다시 들른 베스트바이 매장. 진열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1등 상품엔 삼성 로고가 박혀 있었다. 삼성이 대약진하면서 일본 전자산업과 기업은 만신창이가 됐다. 모두가 극일을 외치지만 해방 후 처음 우리가 입씨름이 아닌 실력으로 일본에 무엇인가 되갚은 소중한 기억 저변에는 삼성이 있었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창업도 대단했지만, 이건희 회장의 수성은 더 훌륭한 성과다. 1987년 세계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체질과 근본 구조를 바꾸자며 시작된 이건희 리더십은 삼성과 국가 경제를 양과 질 모두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인의 가장 빼어난 능력은 제품 경쟁력 이후를 예견한 통찰력과 이를 실행한 혁신 정신이다.

“다가올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며 지적 자원이 회사의 가치를 결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회사는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철학을 팔아야 합니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 창의성이 세계적 경쟁의 궁극적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삼성이 단순 제조업체에서 디자인 회사로 변하는 과정에는 이 회장의 소름 끼치도록 탁월한 안목과 성찰이 깔려 있었다.

이 회장 역시 우리 모두가 그렇듯 완벽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가 기업인으로서 남긴 공과를 차분히 평가해 공은 취하고 과는 성찰하면 될 일이다. 삼성 임직원과 유가족이 상심해 부고를 알리는 날 일부 여당 정치인들 추모사는 씁쓸했다. 과거 문제를 현재 기준으로 비난하며 잘못된 고리를 끊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훈계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삼성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자긍심, 대한민국 인지도를 지난 30년간 향상시키는 동안 정치권은 어떤 변화를 보여줬는가? 운동권 출신 여당 정치인들은 혁신은커녕 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의 근간을 흔들며 새로운 권위주의로 나라 경제를 후퇴시키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지나 않았는지 먼저 성찰할 일이다.

필자는 감리위원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문제를 제기했고, 삼성물산 합병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미래를 위해 지배 구조 개혁을 외치는 경영학자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배우자만 빼고 다 바꿔 혁신하자, 세계 일류 제품으로 사업보국하자는 고인의 선한 의지만 기억하고자 한다.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 임직원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겁다. 이제 더 이상 거인의 어깨를 빌려 미래를 바라볼 수 없다. 남겨진 많은 소송과 준법 문제가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 앞에 불확실성으로 작용하며 국민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 하루빨리 이미 일어난 법적 문제들을 매듭짓고 국민에게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정치권도 정치와 경제를 엄격히 분리해 기업인이 기업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삼성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지속 가능한 기업으로 남기 위해서는 환경, 노동, 사회적 책임, 기업 지배 구조 모든 부분에서 세계적 기준으로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 임직원들이 고인 뜻을 받들어 국가 경제의 큰 버팀목으로 든든히 자리해 주기를 바란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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